문화이야기

잃어버린 불두

파울리나 2009. 8. 3. 23:56

 

경주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독 목이 잘리고 몸이 동강이 나서 머리만 남아 있는 불상들이 여기 저기에 널려 있다. 이런 섬뜩한 모습의 불상을 만나게 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누가 그랬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일본사람들이 저지른 무모한 짓인가 아니면 불교를 믿지 않는 집단들의 소행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우울증에 걸린 미친 사람의 단순한 행위였을까... 이렇듯, 역사의 흔적들은 늘 나를 우울하게 하고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경주 분황사에서 출토된 일련의 석조불상군이 전시되어 있는데 모두 머리와 손의 일부가 결실된 상태이다. 이 13구의 불상들은 1965년 12월 분황사의 뒷담에서 북쪽으로 33m 정도 떨어진 우물 속에서 보살입상 1구, 불두 5구, 광배 1점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된 이래 13세기 전반의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진 사찰이다. 분황사 경내에 있는 불상들은 언제쯤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조선조 5백년간 내려온 유교가 만든 폐해로 불교에 대한 억압이 한창 심할 때 우물 속에 넣고 메운 것이라 한다. 세월에 마모되고 목이 잘려 있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이라기엔 왠지 어깨가 왜소하고 너무 힘이 빠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경내의 석조불상군

              

                분황사 석조불좌상, 통일신라, 높이 각각 51cm, 44cm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불상의 머리부분이 완전히 결실된 채 불신만 남아 있는 창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상 2구가 놓여 있다. 두 불상 중 1구는 일제시대 때 창림사 절터에서 서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매몰된 상태로 발견되어 이전된 것이다. 또 다른 1구는 1964년 8월 13일에 경작지를 수로공사할 때 우연히 땅속에서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창림사는 경주시 내남면 탑리 남산 기슭의 일명 탑골에 있었던 사찰로 1918년 가을에 일본인 오사카긴타로(大坂金太郞)가 이 부근에서 ‘창림’이라는 사명이 양각된 수키와를 발견함으로써 절이름이 밝혀졌다. 창림사는 『삼국유사』권 1에 따르면 신라 박혁거세와 알영비가 태어난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고려사』권 4에는 “고려 현종 12년(1021) 5월에 경주 고선사의 금라가사(金羅袈裟)와 불정골(佛頂骨), 창림사의 불아(佛牙)를 내전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21에도 “금오산 산록에 신라 때의 궁궐터가 있었는데 훗날 그곳에 창림사를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창림사 석조비로자나불상, 통일신라 855년, 높이 72cm   

  창림사지의 석조비로자나불상은 1824년 같은 절터에 있었던 삼층석탑이 한 석공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의 “당대중9년(唐大中九年)”에 의해 855년에 탑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불상은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유일한 비로자나불상으로 현재 높이는 약 75cm, 72cm로 거의 같은 크기이나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어 화강암의 석질이 약간 부식된 상태이며 불신의 세부표현이나 두 손의 조각이 뚜렷하지 않다.

  경주 건천읍 신평2리 석조비로자나불상 역시 목이 완전히 결실된 상태로 하원신마을 앞에 있는 연못 부근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최근 2006년 4월 30일에 도난당하여 현재 그 소재지를 알 수 없다. 이 불상의 원소재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처음 발견된 곳은 『삼국유사』권 1에 나오는 신라 선덕여왕과 관련있는 영묘사 옥문지 근처에 있는 여근곡과 가까운 지역이다. 이외에도 굴불사지 사면석불이나 용장사지 석불좌상, 장항사지 석불입상, 삿갓골 석불입상, 철와곡 발견 석불두, 약수계 마애불입상 등 경주지역의 어느 곳을 가든지 머리가 잘리고 몸만 남아 있는 불상이나 여러 조각으로 동강이 나 다리가 없는 불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신평리 석조비로자나불상,              장항리사지 석조불입상, 통일신라,
                   통일신라, 높이 110cm                   높이 300cm

  불교가 가장 탄압을 받았던 법난의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말 이후 불교교세의 팽창에 따른 현실적인 폐해로 인한 국가재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신흥유생들에 의해 억불숭유의 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불교의 억불정책은 단순히 불교의 현실적인 폐해 그 자체만 문제가 아니라 고려말에 성리학을 수용한 새로운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이 정치적 주요 쟁점으로 삼아 불교를 심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 5교양종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한 후로 불교는 사회를 주도하던 지배적인 종교로서 힘을 잃어 버렸다. 문종대에는 백성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세조대에 다시 흥불의 분위기를 맞이하는 듯했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성종과 연산군, 중종대에 이르러 억불의 차원을 넘어서 배불 또는 폐불의 정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성종 2년에 간경도감과 염불소를 폐지하고 4년에는 양반들의 부녀가 출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6년에는 도성 내외에 있던 비구니 사찰 23개소를 모두 헐어버렸다. 또한 성종 23년에는 도첩의 법을 정지시켰으며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부역과 노역으로 충당시켰다. 이외에도 인수대비가 정업원에 보낸 불상을 유생들이 모두 파괴했는데도 성종은 이를 벌하지 않았으며 불교식의 의례나 장례의식을 엄히 금하였다. 연산군은 선.교종의 도회소(都會所)를 없애고 관청으로 삼은 것을 비롯하여 도성 안에 있는 흥천사와 흥덕사 및 원각사 등을 폐했으며 승니를 잡아다가 관노로 삼거나 혼인을 치르게 하여 자연 승려의 수가 줄어들고 사원이 폐사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되었다. 또 중종 5년에는 각 도의 혁폐한 사찰의 토지를 향교에 귀속시키고 7년에는 흥천사와 흥덕사의 대종으로 총통을 주조케 했고 심지어 경주의 동불(銅佛)을 부수어 군기로 만들게 했다. 영.정조대에는 절터가 명당자리라 하여 무덤을 마구 만들고 그 토지를 빼앗는가 하면, 법당에 불을 지르고 승려를 학살하는 일도 있었으며 절의 건물을 개인의 사당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둥둥... 이는 조선 사회의 기득권자인 왕실과신진사대부들이 유교를 앞세워 불교에 대해 얼마나 잔학하게 억압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왕조 내내 불교에 대한 탄압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음에도 왕실의 후궁들이나 비빈들, 일반 대중들은 외침과 정변의 혼란 속에서 불상을 조성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며 미륵신앙을 신봉하고 입석의 미륵불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이 얼마나 모순된 행위인가...  조선의 불교가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온 것은 가상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새로운 불교로 전환되지 못한 시대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역시 아쉬움이 남아 있다. 조선왕조 몰락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불교의 매판화와 일본 불교로의 귀속정책 등과 함께 일본사람들에 의해 무법적인 불상의 파괴가 계속되어 왔다.

  오랜 세월동안 머리가 없는 채 꿋꿋이 살아남은 불상들을 바라보며 경주박물관을 거닐다 보면, 지나간 우리네의 역사와 진실이 서려 있는 듯하다. 이렇듯, 잃어버린 불상들은 신라인들의 절실한 불심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조선조 유생들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일본인들의 만행으로 허망하게 무너져 처참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우리 역사의 흔적이자 역사 속에서 되찾고 싶은 이상향이기도 하다.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이숙희 감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