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야기

제주 올레길

파울리나 2009. 7. 31. 10:56

  요즘 전국적으로 제주의 ‘올레’가 유행이다. 제주공항에는 올해 들어 부쩍 올레길을 걸어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올레’는 유명해지는 한편 빠른 속도로 잘못 알려지고 있다. 원(原) 의미를 잃어버리고 변질된 의미를 반추하게 될 때 금방은 톡 쏘는 입맛을 느낄지 모르나 두고두고 아껴먹고 음미하는 그 소중한 맛은 간직하지 못하고 만다. 사람들이 그토록 먼 길을 마다않고 허위허위 올레를 찾아오는 것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소박한 맛, 무광택의 기억을 찾아서일 것이다. 

    올레는 탐욕스럽게 먹어대는 길이 아니다. 어느 정겨운 마을 안으로 가만가만 걸어 들어가면 낮은 돌담을 끼고 적요하게 휘어진 길을 만나게 되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문득 마당이 나오고 툇마루에 앉아서 콩깍지를 까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 그런 고즈넉한 맛이 올레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제주의 전통적인 초가를 보면 올레가 있어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올레’란 집으로 출입하는 골목길을 말하는 제주어(濟州語)이다. 올레가 반드시 제주에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지방에도 이런 골목길은 있겠으나 제주의 올레에는 독특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빛깔과 리듬이 있다. 단순하게 통로로서의 기능만 설명해버리고 말면 어딘가 아쉽고 마음 한구석이 서운해지는 게 제주의 올레이다.

    시골마을의 웬만한 집에는 거의 올레가 있었다. 생활공간인 방은 옹색할 정도로 작고 보잘 것 없을지언정 제주사람들은 문을 여닫는 장치의 대문 대신에 열린 공간의 올레를 두었던 것이다. 일직선으로 난 올레도 있으나 거의 대부분의 올레는 S자 형태로 리드미컬하게 굽이져 있다. 확 꺾어지는 골목길이 아니라 슬쩍 굽이돌아 나가는 부드러움이 있다.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집은 활짝 열어젖힌 것도 아니요, 완전히 감춰진 것도 아닌 느낌으로 다가온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식구들의 정겨운 목소리는 들려오나 세세한 내용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집안에 사람이 있음을 짐작하게만 할 뿐 대화의 내용은 새어나가지 않았다. 올레는 열려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차단벽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게 올레는 그 집의 아름다운 여백(餘白)이 되어주었다.
 


 
또한 올레는 그 집의 탯[胎]줄이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이웃과 연결되는 끈이었다. 집안 식구들만의 전용도로라 할 수 있는 올레가 끝나는 지점에서 세상으로의 길은 시작된다. 이 접점(接點)에 정주목을 양옆에 세워두고 정낭을 걸쳐두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주사람들은 아무것도 설치하지 않았다. 그냥 열린 공간이었다.

    그러나 올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문, 마음의 대문이 존재하였다. 제주사람들은 무턱대고 남의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올레의 입구에서 나름대로의 기척을 하였다.

“순덱이어멍 잇이냐?”

“아시, 잇어?”

 올레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자신의 방문을 집안사람들이 알아채도록 밝히는 것이 예의였다. 

    주인도 마실을 갔다가 돌아올 때는 올레에 들어서면서부터,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해서 당신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집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알리곤 했다. 출타할 때에도 올레를 나가면서 기척을 하곤 하였다.



 
한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올레의 입구를 먼올레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마음 좋은 외할머니 같은 해묵은 폭낭〔팽나무〕이나 멀구슬나무〔?檀木〕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있었다. 아이들이 모이면 땅따먹기, 자치기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하였다. 어른들이 모이면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그럴 때, 누군가 개역을 타오던가 고구마라도 쪄내오면 나무그늘은 더욱 구수해지곤 하였다. 마을의 최신정보가 나누어지고 근심 걱정이 공유되던 공동체의 공간이었다.  

    이제 제주의 주거생활이 바뀌면서 올레는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다. 마을의 큰 어르신 같았던 먼올레의 멀구슬나무나 폭낭도 자동차 주차에 불편하다면서 망설임 없이 베어버리고 있다.

    그 그늘 아래서 건들바람을 쐬며 나눴던 정겨운 이야기들, 맑은 웃음소리들은 어디에 가서 무엇이 되어있을까. 저 나지막하게 굽이져나간 올레를 따라 피던 마농꽃〔나도사프란꽃〕의 소박한 눈부심을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만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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