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시. 책 사랑)

조선시대 교육기관

파울리나 2009. 6. 24. 15:11

 

 

조선시대 교육은 관학과 사학으로 나눌수 있다.

대표적인 관학으로는 최고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수준의 교육을 담당한 사부학당이 서울에 설치되어있으며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사학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이들 교육기관은 오늘날처럼 초,중,고, 대학과 같이 계통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성균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간으로 단순한 관리양성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치 이념을 창출하고 실현하는 중심기관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끊임없이 성균관 교육에 관심을 기울었으며 적극적인 장학정책을 시행하였다. 

교사의 수는 37명이었으며 학문과 덕성이 뛰어나야 했다.실질적인 책임자는 대사성이다.

 학생은 상재생: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과 하재생 : 사부학당이나 간단한 시험을 거쳐 입학

100% 무상교육이었으며 균역, 부역 각종 잡역면제, 과거시험참여 특전, 자치회인 재회를 구성하여 자율적인 학교 생활을 영위하였다.

교과목으로 사서오경을 중요시 하였으며 사장보다 경학을 중시하였다.

국가에서 지급한 전답, 노비 어장, 그리고 수시로 지급되는 현물로 구성. 노비가 재정에 큰 기여.

양현고에서 재정 담당

 

사부학당

고려시대의 동서학당에 해당한다. 서울의 동서남북에 설치된 교육기관으로서 독립된 교육기관이라기 보다 성균관에 예속된 학교였다. 양반의 자제와 민중의 자제중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중등정도의 교육을 실시 성적이 우수한 자는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각 학교마다 교수2명, 훈도2명을 두었는데 성균관 교사였던 전적과 박사가 훈도는 학정과 학록, 학유가 겸직. 8세 이상아동들이 취학, 6월 도회,알성시,생원,진사시험에 응시할수 있는 특전. <소학> <가례>가 중요시. 특히 소학은 성균관 진학시  중요한 시험과목임.

기본적으로 성균관에 예속되어 양현고에서 재정 담당

 

향교

지방학교로서 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교육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향교가 그렇게 성하지 못하였으나 태조 초 향교의 진흥 여부에 따라 지방수령을 평가하게됨에 따라 향교가 성하게 되었다.  향교의 설립 목적은 성현의 제사를 모시고 지방 유생들을 교육하는 한편 관리 양성의 목적을 겸하였다. 향교의 입학 자격은 양반의 자제 또는 지방 관리로서 16세 이상40세 이하를 원칙으로 하였다. 교육정도는 사부학당과 같은 중등교육 수준이었다.

6품이상의 문신이 교수관으로 임명.16세기 이후 교수관 파견이 없어지면서 지방사족들의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 향교운영을 맡은 자를 교임이라 하였다.

교생 또는 유생으로 불렸으며 군역을 면제받고 무상교육의 특전이 있었다.

<소학> <효경> <삼강행실>등이 중요시. <소학>을 특별히 중요시

전답과 노비가 기본재정이었으며 재정은 주로 유생들의 주식비로 사용. 조선후깅[ 양사재의 재정은 향교와 별도로 운영. 토지와 설립당시 모금한 기금이 주된 재원

 

서원

조선중기 이후 보급된 민간 사학으로 선현존경과 후진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중종 대에서 풍기 군수 주세붕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 서원이 효시다. 서원은 번거로운 세속을 떠나 조용한 곳에 위치하여 한 사람의 명현 공신을 제사하고 후진 양성을 하는 곳으로 학칙이나 규칙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이 공부할 수 있었다. 서원 교육은 성리학의 독특한 교육관에 입각하고 있다. 교사는 학습자의 밖에 있는 교육 내용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제자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로 강조되었다. 따라서 서원 교육에서는 무엇보다도 스승과 제자의 사제지도를 중요시 하였다.

서원이 번창함에 따라 서원이 특권화, 붕당화 되엇으면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개항과 더불어 근대교육이 유입됨에 따라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원생이라 불렸으며 생원, 진사는 무조건 입학을 허가.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서-역-춘추 등의 경사자집 순으로 교육과정이 이루어짐 서원교육의 핵심은 경전 공부가 아니라 거경궁리가 강조

조지와 노비가 주된 수입원. 지방관의 배려에 의한 현물과 국가에서 재물로 제공한 현물도 중요한 재정적 기여

 

서당

서당은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의 자제들에게 기초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사설 초등교욱기관이다. 고구려의 경당에서 비롯되어 고려시대에 일반화되었으며 17세기 이후 동족부락의 출현으로 지방호족과 사족에 의해  친족간의 화목과 가학의 계승발전이라는 명분으로 경쟁적으로 설립되었다.

일제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초등교육기관으로 존속하여 일제 강점 초기에는 오히려 그 숫자가 증대되었다가 3.1운동 실패후 급격하게 감소하였으며 1923년을 기점으로 보통학교에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서당의 교사는 훈자이라 불렀으며 훈장의 신분은 명문 사족에서부터 ㅁ향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으며 18세기 이후 몰락양반 출신의 서당 훈장이 증가하면서 신분적 지위나 처지가 열악해짐.

천자문에 근사록에 이르기 까지 다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