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시. 책 사랑)

조선왕조실록(2)

파울리나 2009. 6. 24. 15:06

 

15. 광해군일기 : 이름은 이혼. 방계 출신인 아버지 선조가 왕통의 불안정성을 무의식적으로 부담스러워하여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전란이 터지면서 왕비 소생의 대군은 없고, 총애하던 신성군은 죽었고, 동복형인 임해군은 포악하다는 이유로 이미 제외되어 있어 결국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기회로 세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명나라의 고명이 와야 진정한 세자의 위를 굳힐 수 있으나, 명나라는 형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란이 끝나고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다. 적자를 기다렸던 선조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제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을 물리고 영창대군을 앉히려는 찰나, 돌연 선조는 급사를 했고,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 사이에서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의 광해군 교서도 숨긴 채, 인목왕후에게 찾아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해 수렴청정을 할 것을 청했지만, 인목왕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광해군의 즉위 교지를 내린다. 주요 사건으로는 인조반정이 있고, 주요 인물로는 허균, 허준 등이 있다. 광해군은 익히 알려졌듯이, 실리적인 외교의 추구로 한창 일어서는 청나라를 자극하지 않을 뿐더러 균형점을 유지시키려 했다. 하지만 반정측이 자신들의 정당한 사유를 들기 위해 이를 들었지만, 이로 인해 인조는 청나라 황제에게 직접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부딪혀가며 절을 하는 사태로 가고 말았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을 겪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은 유배지도 자주 바뀌었다. 이괄의 난이나 청의 구실 등으로 강화도, 태안, 제주도 등 이리저리 옮기다가 결국 제주도에서 귀양 생활 18년만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6. 인조실록 : 능양군으로 선조와 인빈 소생인 정원군의 맏아들이다. 즉 광해군과는 삼촌과 조카사이가 되는 셈이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북인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서인과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의 대립과 일당독재의 환국이란 정치 형태를 겪으면서 조선의 정치는 자정 작용을 잃게 된다. 이들 인조반정 세력이 사실 반정을 일으킨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들었던, 선왕의 독살, 과도한 토목공사, 두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 아니다. 북인들의 권력 장악과 정적 제거 과정에서 너무 궁지로 몰아넣어 반대파의 자극을 심하게 받게 했다는 광해군 일당의 과도한 실행이 불러온 과오일 뿐이다. 광해군 일파가 조금 더 서인이나 남인 세력 등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았다거나 더 철저히 없앴더라면 인조반정과 같은 사태는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주요 사건으로는 이괄의 난, 병자호란이 있다. 주요 가족으로는 아들 소현세자와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가 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자로 병자호란 이후 동생인 봉림대군과 같이 청나라의 인질로 잡혀간다.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청의 선진문물과 서양의 신기술 등을 보면서 큰 충격과 깨달음을 얻고는 선진문물의 중요성과 수용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의당 청 관료들도 소현세자와의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동생인 봉림대군이나 인조는 극심한 반청 감정이 컸기에 소현세자가 억류에 풀려 조선으로 돌아와 아버지 인조에게 청에 있는 신기술, 문물 등을 소개하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인조의 증오와 분노를 사 아무도 모르게 독살을 당했다. 물론 소현세자뿐 아니라 소현세자의 아들과 며느리까지 죽게하여 철저히 소현세자 일가를 몰살시켰다. 그리고는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니, 조선이 어쩌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물건너 가고 말았다. 인조의 등장은 이처럼 조선 왕조에 있어 도움은 커녕 해서는 안될 짓만 골라서 한 멍청하고 무식한 바보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조선 왕조가 파멸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장렬왕후 조씨는 15세의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려 이후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살아서 대궐의 최고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늙은이에게 시집와 슬하에 자식 하나 없이 지내며 그녀로 인해 조정이 예송논쟁이 휩싸이게 만드는 균열만을 만들게 했을 뿐이었다. 여자의 일생이 이렇게 비참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이렇듯 인조는 주변인, 더 나아가 국가를 엉망으로 만든 인물로 기록되어야 하고 그렇게 기억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17. 효종실록 : 이름은 이호(봉림대군). 인조의 차자이자, 죽은 소현세자의 친동생이다. 아버지 인조가 의도적으로 형인 소현세자를 죽이고 봉림대군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청나라 심양에서 곧장 조선으로 온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효종은 잘 알려진대로 반청 사상의 일환으로 북벌론에 심취했다. 그리하여 군을 양성시켰으나, 이는 오히려 아직 수습되지도 않은 조선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몰고 갔으며, 늘어난 군대, 군사들의 재정을 책임져야 하는 민중의 고초는 더욱 커지고 말았다. 더욱이 강대해져가는 청나라에게 대항하기는 커녕 틈만 보고 있다가 결국 청의 나선 정벌 때에 조총부대나 파견해서 도와주는 역할만 했다. 주요 사건은 김자점의 역모 사건이 있다. 결국 그렇게 북벌에 대한 애만 끓이다가 죽은 효종에게 그 마음씀을 인정해 선왕과 나라에 효심을 보였다는 뜻에서 효종이라는 묘호를 붙여주었다.

 

18. 현종실록 : 효종의 외아들로 이때부터 왕실의 대가 끊길듯 말듯한 위태로움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주요 사건은 예송논쟁이 있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이 예송에 휩쓸리고 말았다. 예송의 주요 문제는 효종이 죽음으로서 효종의 계모이자 현종의 계조모인 장렬왕후 조씨가 입어야 할 상복의 기간이었다. (정말 이럴 때는 쓸데없는 걸로 시간낭비하는 유학의 한계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기에 차남에 해당하는 기년상(1년상)을 해야하는지, 왕위를 계승했기에 장남이나 다름없으므로 장남의 상인 3년상으로 해야하는지가 야기된 것이다. 서인의 송시열, 송준길은 효종의 차남에 입각해 기년상을 주장했고, 남인의 허목, 윤휴는 왕위계승을 한 장남으로 여겨 3년상을 주장했다. 현종은 이 둘의 주장에 기년설을 채택해 서인의 손을 들어주며 더 이상 논쟁을 금하였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럴려니 넘어갔겠지만, 또다시 예송 문제는 터졌는데, 바로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의 죽음이었다. 계모이고 어린 나이에 들어온 장렬왕후 조씨는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으로 본인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쌓이고, 그녀로 인해 정계는 혼란이 일어났다. 역시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라는 것을 강조해 대공설(9개월)을, 남인은 중전으로 지낸 큰며느리로 인정하는 기년설(1년)를 주장했다.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주어 서인은 실각했다. 주요사건은 예송논쟁이 있으며, 이런 예송논쟁을 통해 조선사회는 우리가 아는 엄격한 유교 질서의 재편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외에도 북벌계획의 중지, 대동법의 시행, 하멜일행의 표류 등이 있다.

 

19. 숙종실록 : 현종의 외아들로 이름은 이순. 숙종 역시 왕위에 오르자마자 서인들이 제기한 예송 논쟁에 휩쓸리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 인선왕후의 상이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현종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다시금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하였고, 이 일은 전국 유생들에게까지 확산되어 들끓게 되었다. 숙종은 결국 선왕의 유지를 따라 다시 남인들을 지지하였고 송시열을 유배보냈다. 이 일은 단순히 유배보낸 것이 아닌 서인 세력을 몰아냈음을 의미했다. 바로 환국정치의 시작이었다. 환국정치는 왕이 대립하는 두 당 가운데 하나의 손을 들어 상대당을 싸그리 몰아내는 정치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환국 사건이 일어날수록 상대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일당 독재를 성립시키며, 일당은 결정권을 쥔 왕의 손 아래 굴복할 수밖에 없다. 왕의 권위와 입지가 강하다면 이런 환국을 유지시킬 수 있지만 상대당 세력이 궤멸되고 일당의 전제도 부패로 무너지면, 권위나 입지가 약한 왕은 주변 척신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소위 세도정치를 불러올 수밖에 없게 된다. 숙종이 벌인 실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두 당의 소모를 너무 심하게 소멸시킨 것이다. 주요 사건은 경신, 기사, 갑술 환국, 무고의 옥 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의 처리를 놓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된다. 주요 가족으로는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가 있다. 인현왕후는 우리가 잘 알듯이 희빈 장씨와의 다툼에서 밀려 폐서인되었다가 다시 왕후로 복귀되는 유례없는 일을 겪은 여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희빈 장씨는 그녀 스스로 야심과 자신의 욕심이 너무 컸기에 왕후의 자리도 올랐으나 빈으로 강등되고 이어서는 사약까지 받는 결과를 자초하게 되었다. 희빈은 사약을 받기 전 자신의 아들인 경종을 보게 해달라는 간청으로 아들인 경종이 오자 하초(생식기)를 잡아당겨 구실을 못하게 만들었다. 이로인해 경종이 후사도 없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들 한다.    

 

20. 경종실록 :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로 이름은 이균. 경종은 즉위하면서부터 왕권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선 숙종이 병약하고 후사를 못 낳은 세자 경종을 보다 못해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 연잉군 영조를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또한 세자를 대신해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대리청정을 시킬 정도로 연잉군의 지위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자 세자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측은 반발하고 나섰지만 숙종도 노론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으며 이것은 경종이 왕위에 등극해도 여전히 노론은 활동하고 있었다. 노론은 그 배경을 믿고 경종에게 건저를 주청해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제를 책봉하기에 이른다. 나가서 노론은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할 것을 청해 경종과 소론의 입지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대리청정으로 인해 소론측은 더 이상 노론을 두고 볼 수가 없어 노론을 역모로 몰아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인다. 소론은 이 기회에 연잉군마저 죽이려 했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경종이 죽음으로서 소론의 권력 시대도 끝이 나고 만다. 이렇듯 경종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격한 대립으로 모두 무너지는 붕당의 끝을 고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1. 영조실록 : 이름은 이금.(연잉군) 숙종과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경종의 이복 동생이다. 소론측이 노론측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왕세제인 연잉군도 역모에 가담했다고 보고했기에 영조의 생명은 그야말로 실날같았다. 다행히 대비인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계비)의 보호 아래 영조의 목숨은 부지될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그가 한 일은 붕당간의 대립을 없애기 위한 탕평책을 구가했다는 것이다. 영조는 그 스스로 왕세제 시절부터 당파간의 대립으로 자신의 목숨이 존망에 달린 것을 겪었기에 극심한 붕당의 폐해를 없애려고 노력한 것이다. 탕평책의 주요 목적은 어느 한 붕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니라 각 붕당을 고루 등용해 서로간의 세력을 맞추고 그 사이에서 왕의 권력을 증대하여 붕당을 이루는 대신들을 통제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없어졌던 남인, 소북도 정계에 다시 진출하여 소위 사색당파가 고루 정계에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당파 쪽에서 다시금 세력을 잡으려는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도세자 사건이다. 아무리 사색당파를 고루 등용했다 하더라도 영조를 지지하고 보좌했던 측은 노론이었다. 자연 노론의 기반은 다른 당파에 비해 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불안함을 느낀 다른 당파들이 죄다 차세대 왕이 될 사도세자 편에 붙어 자신들의 기반을 조성하려 하자 이에 노론측이 사전에 이런 움직임을 제거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비행10조목을 들어 영조에게 진상한 것이다. 영조는 내막도 모른 채 사도세자를 닥달하다가 사도세자의 돌발적 행동에 분을 이기지 못해 자결을 명하고, 그것을 거부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 죽게 했다. 후에 영조는 이를 매우 후회해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다. 주요 사건은 탕평책, 사도세자 사건, 균역법 등이 있으며 주요 인물은 실학파의 등장으로 안정복, 홍대용 등이 있다. 영조는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고 (83세), 가장 오랫동안 재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51년 7개월) 주요 가족은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이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0세 넘어 얻은 아들이라 2살때 이미 세자에 책봉되었다. 15살 때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었는데 이때 노론측에서 그를 모함했다. 이때부터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금이 갔으며, 사도세자의 돌발적인 발작 증세는 점점 늘어만 갔다. 혜빈 홍씨는 이런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로 궁중 소설로 유명한 '한중록'의 저자이기도 하다. 혜경궁은 그녀가 살던 궁의 궁호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 모두 노론측이라 사위임에도 사도세자를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녀의 심정은 더욱 복잡하고 암울했을 것이다.

 

22. 정조실록 : 이름은 이산.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아들로 영조에게는 손자가 된다. 정조 역시 당쟁의 암투 속에서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삶을 살았다. 이미 아버지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에 노론은 다음 타자인 정조도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속내를 철저히 숨겨야 했으며, 굉장한 게략을 세워야 했다. 그는 왕위에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며, 자신을 호위하던 홍국영을 앞세워 막대한 권력을 그에게 주었다. 홍국영이 그 권력에 취해 만용을 부리고 있을 동안, 정조는 착실히 뒤에서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우기 위한 규장각을 굳건히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규장각이 활동해도 되겠다 싶을즘, 홍국영을 퇴출시켰다. 그후 정조는 몸소 자신의 정치를 표방하며 정국을 이끌어 나갔고, 사색당파로 갈린 조정은 이제 정조의 정책에 합류해야 한다는 시파와 당론을 지켜야 한다는 벽파의 두개로 압축되었다. 이것이 정조의 탕평책이었다. 영조의 탕평책이 각 세력 간의 균형으로 조정을 유지시키려 했다면, 정조의 탕평책은 정조 스스로 권력을 키워 조정을 자신의 세력 안으로 끌어들여 조정을 유지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나름대로 선진 사상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개혁 인물이었다. 따라서의 그의 정책은 실학, 서학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고 이는 벽파를 고집하던 소수의 노론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만약 정조의 정책이 천주교 박해를 겪지 않고 계속 나갔다면 조선은 다시 바뀔 지 모르는 미래를 맞이했을 것이다. 신해박해는 천주교의 수용에 대한 불가에 따른 결과였다.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일이 크게 비화되면서 거센 반발과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이것은 서학에 호의적인 정조마저 어쩔 수 없이 가라앉히기 위해 중단시켜야 하는 상황으로 만들어졌다. 이로인해 천주교를 믿고 있던 시파의 주축들은 벽파들의 대대적인 숙청에 의해 실각되고 만다. 정조로서도 뼈 아픈 손실이었을 것이다. 조정의 세가 다시금 벽파에게로 돌아가고, 정조는 그 위기를 모면하려 할 순간에 죽고 말았다. 이로인해 모든 권력은 일부 남았던 벽파, 그중에서도 외척 일가에게로 돌아가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고 만다. 주요 인물로는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등이 있다.

 

23. 순조실록 :  이름은 이공. 정조의 둘째 아들로 문효세자가 죽자 세자에 책봉되어 11살의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이는 세도정치의 결정적인 정착을 의미한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이상 수렴청정을 받아야 하는데, 당연 수렴청정은 왕실 최고 어른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이 때 여전히 살아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써 그녀가 옥새를 쥐자 벽파 인사들이 대거 중앙 요직으로 진출하게 된다. 또한 천주교의 박해도 더욱 강도가 높아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특히 '신유사옥'으로 인해 가뜩이나 위축된 시파들은 거의 다 쓸려나갔다. 이제 벽파의 세상인 듯 보였으나 시파계인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은 그들도 막을 수 없었다. 더욱이 순조가 15살에 친정을 하고 1년 후에 정순왕후가 죽음으로 벽파는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이제 권력은 김조순에게로 돌아갔다. 중앙정계의 요직인 빈 벽파를 대신해 안동 김씨 일족이 대거 차지했다. 조정의 세는 안동 김씨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 부패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수록 썩어들어갔고 민란은 이때부터 빈번히 일어나게 된다. 홍경래의 난은 그 대표적 사건이었다. 순조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 조씨 일문을 들여왔으나 균형과 견제는 커녕 호랑이 하나를 더 늘린 셈이 되었다. 주요 사건은 신유사옥, 홍경래의 난 등이 있다.

 

24. 헌종실록 : 순조의 손자이며 일찍 죽은 효명세자 익종의 아들이다. 헌종 역시 8살의 어린 나이에 위에 올라 순조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15살에 친정을 하게 된다. 이미 순조 시대부터 조선 사회는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격화된 것은 헌종 시대부터이다. 헌종의 친정과 함께 풍양 조씨의 세력은 강해졌다.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나 모두 정계에서 자신들의 이권 싸움에만 집착했을 뿐 조선을 돌보려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위 삼정의 문란은 이 시기에 큰 문제가 되었다. 또한 이양선의 잦은 출몰은 조선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 갔다.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선의 사회를 손댈 수도 없는 채 22살의 젊은 나이에 일찍 죽고 말았다. 더욱이 그는 후사도 남기지 않아, 명종 이후로 다시 한번 왕계가 끊기는 일이 벌어졌다.

 

25. 철종실록 : 이름은 이원범.(속칭 강화도령)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인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비인 조대비 일족인 풍양 조씨 일문에서 먼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해 재빨리 손을 썼다. 그리하여 항렬이 높은 강화도령 원범을 앉히게 된 것이다. 강화도령 원범의 족보를 간단히 보자면,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소생인 은언군 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 이 세 아들 중 전계대원군 이광과 이광의 아들 원경은 역모에 휘말려 사사되고, 이광의 남은 두아들 경응과 원범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즉 철종은 정조의 조카 손자가 되며, 순조와는 5촌뻘이 되며, 선왕인 헌종과는 7촌뻘의 삼촌이 되는 셈이다. 강화도에서 평생 농사만 짓던 원범은 왕위를 이으라는 교지를 받고 영문도 모른 채 궁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안동 김씨 일족은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철종에게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비로 맞아들이게 하니, 정계는 다시 안동 김씨가 거머쥐게 된다. 철종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삼정이정청이란 임시 기구가 생기기도 했으며, 전국적인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이런 혼란 속에서 동학이 탄생되어 꾸준히 기반을 다지게 된다. 철종 역시 왕통을 이었지만 후사 없이 죽고 말아 다시금 왕위를 잇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로써 철종실록까지가 조선왕조실록이라 불리는 기록물의 마지막으로 뒤의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본인들이 이왕직을 설치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정통 조선왕조의 산물로 보지 않아 넣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이라고 일컫는 것은 태조실록에서부터 철종실록까지이다.

 

26. 고종실록 : 이름은 이명복. 우리가 잘 알듯이 어렸을 때 개똥이라는 이름을 지니기도 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헌종비인 조대비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결탁으로 인해서이다. 조대비 역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일파에 눌려 지내야 했기에 철종의 죽음은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던 차에 안동 김씨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해 파락호처럼 지내며 날을 기다리던 흥선군 이하응과 접선하게 되면서 고종은 왕위에 등극했다. 어린 고종이 등극하면서 조대비는 섭정의 권한을 흥선대원군에게 위임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 평소에 생각했던 개혁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우선 붕당의 근거지인 사원을 철폐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진상제 폐지, 은광 개발 허용, 양인들만 내던 군포를 양반들도 내도록 호포세로 바꾸었으며 비변사를 폐지, 의정부를 부활시켰으며 삼군부를 따로 두어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그러나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천주교도들의 박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은 그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밀고 나갔지만 고종이 20세가 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세도정치를 보아온 그는 고종의 비도 가장 세가 약한 여흥 민씨 가문의 딸로 붙여주었으나 오히려 당사자인 민씨가 강한 정치적 욕심을 보이는 바람에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불러일으켰다. 어쩔 수 없이 고종에게 대권을 넘기자 이번에는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민씨 일파는 대원군과 달리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통해 강화도 조약과 더불어 다른 나라와의 조약 체결 및 개항으로 입장을 유지시킨다. 민씨 일파도 나름대로 개혁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조선 내부는 아직 시행할 준비가 안되었기에 거센 반발과 대원군의 복귀까지 불러오면서 민씨 일파는 다시금 재충전을 해야 했다.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민씨 일파는 외교작전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했으나 일본은 이를 감지하고 배후 조종자인 민씨를 죽이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강력한 두 정계의 카리스마가 사라지니 의지나 전략이 딸리는 고종은 그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아관파천을 통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고종은 더욱 더 궁지에 몰리게 된다. 외교권도 박탈된 상태에서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해 대한제국의 문제를 세계적으로 알리려 하였으나 이도 저지당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이후 1910년 합방 이후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서거, 그의 국상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주요 가족으로는 흥선대원과 명성황후 민씨,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 등이 있다. 흥선군의 계보는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아들로,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명성황후 민씨는 8살에 부모를 여의었으며, 흥선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간택되었다. 흥선군도 명성황후의 부모가 없음을 염두해 뽑은 것이지만 정작 본인이 정계에 참여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의 넷째아들이며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순종이 자식이 없었기에 당연 그가 황태자로서 계승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으며, 순종이 폐위되고나서는 형식상으로는 이왕이라 불렸지만 일본에 억류된 채 돌아가지도 못했다. 또한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 (이방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 상황으로 고국으로 가지도 못한 채 1963년까지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박정희의 주선으로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해 생활하다 1970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방자 여사도 1989년 사망해 영친왕과 같이 묻혔다.

 

27. 순종실록 : 이름은 이척.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유일한 소생으로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인해 황제의 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고쳤다. 또한 이복동생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로 책립했으며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3년이 지난 1910년 한일합방이 성립되면서 순종도 황제에서 왕으로 칭호가 바뀌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들 일가가 창덕궁에 사는 것과 왕위 허호가 세습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결국 53세의 나이인 1926년 생애를 마치고 이 해 6월 10일 국장이 치러지면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주요 가족으로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있다. 우리가 흔히 윤대비라 불리는 이로 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해 생을 마감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녀는 1910년 하방 조약 날인 강요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 하다가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한다. 그렇게 침탈, 해방, 한국 전쟁, 군부 독재 등 한국사의 수난과 격동을 모두 지켜본 채 1966년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렇게 27명의 왕을 살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후대로 올수록 왕통이 귀해지고 알아서 사라진 듯한 느낌을 준다. 조선의 흥망성쇠는 우리의 역사이며 거울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교양으로써 필수적으로 읽어봐야 할 책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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