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측천무후

파울리나 2009. 6. 15. 14:14

 

 

"누구도 도전하지 말라" 후궁에서 황제가 된 철의 여인


역사 이래 정치는 남자들의 몫이었다. 어느 사회에서고 정치적 우두머리는 거의 남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서 정치를 집행하는 이들도 죄다 남자였다. 여자들은, 정치적으로 힘센 남자들과 이불을 함께 씀으로써, 또는 혈연관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이렇게 정치가 남자의 일이었던 것은 그것이 힘과 힘이 날것으로 맞부딪치는 전쟁과 깊은 관련을 지녔다는 데에도 기인할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역사상 몇몇 예외를 알고 있다. 즉 정치계급의 우두머리가 여자였던 경우를 알고 있다. 신라에는 선덕, 진덕, 진성이라는 여성 군주가 있었다. 고대 일본에도 히미코(卑彌呼), 스이코(推古), 사이메이(齊明)라는 여성군주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여성 군주가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카이사르와의 연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결혼으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는 클레오파트라7세다.


군주가 되는 데 때로 성(性)보다 핏줄이나 종교가 더 중요했던 중세 이래 유럽에서도 적잖은 여성군주가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잉글랜드 제해권(制海權)의 초석을 놓은 처녀 군주 엘리자베스1세일 것이다.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영국사에는 엘리자베스1세말고도 여성 절대군주가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몇몇은 메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열렬한 가톨릭 교도였던 잉글랜드의 메리1세(메리 튜더)는 무수한 신교도를 처형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 별명은 오늘날, 보드카에 토마토주스를 섞어 만든 칵테일 이름이 되었다.


여성 군주는 유럽 서단(西端)에만 아니라 동단(東端)에도 있었다. 러시아 표트르3세의 황후 예카테리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라 계몽전제군주로서의 허명을 얻었다. 중부유럽이라고 여성군주가 없었겠는가? 오스트리아제국 여제와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왕국 여왕을 겸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힘센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유럽 각국으로부터 군주로 인정받기 위해 오스트리아계승전쟁이라는 홍역을 치르긴 했으나,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남편 프란츠1세보다도 오히려 더 힘있는 군주였다. 그녀의 정치적 재능과 결기가 아니었으면, 그녀의 남편은 독일 제1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 영국의 역사에도 여러 명의 여성 군주가 있었는데 이들 나라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에 단 한 명의 여성군주만 있었다는 게 이채롭다. 그녀가 당대(唐代)의 측천무후(則天武后ㆍ624~705)다.


측천무후라는 호칭이 여제가 아닌 황후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므로, 무측천(武則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많다(앞질러 말하자면, 그녀는 본디 당 고종ㆍ高宗의 황후였다). 무(武)는 그녀의 성이다. 여기선 전통적 호칭을 따라 측천무후라 부르련다.


측천무후는 중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두드러지게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황제로서만이 아니라, 황후로서, 섭정(攝政)으로서도 큰 권력을 휘둘렀다.


그 점에서 측천무후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이른바 '즐거운 잉글랜드'(Merry England)를 난숙의 단계로 이끈 엘리자베스1세의 선배였을 뿐만 아니라, 피렌테의 메디치가(家) 출신으로 16~17세기 한 시절 프랑스 궁정과 사회 전체를 쥐락펴락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마리 드 메디시스, 청(淸) 말기 서태후(西太后)나 조선조 명종 때의 문정왕후 같은 여자들의 선배이기도 했다.


측천무후의 궁중생활은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시작되었다. 649년 태종이 죽자 그녀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한 사찰로 출가(出家)했다가,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궁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여자가 다시 그 아들의 후궁이 된 것이다. 무후는 고종과의 슬하에 4남2녀를 두었고, 결국 655년 왕황후(王皇后)를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타고난 정치적 재능의 결과였다.


그 이후 당 황실은 온전히 무후에게 장악됐다. 그녀는 고종이 살아있을 때부터 실질적 최고 권력자 노릇을 하며 전실 자식을 황태자 자리에서 쫓아냈고, 제 자식들에게 차례로 그 자리를 주었다.


683년 고종이 죽고 무후의 셋째아들 이현(李顯)이 황제(중종ㆍ中宗)가 되었으나, 외척의 세가 커지는 듯하자 무후는 그 이듬해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황제 자리(예종ㆍ睿宗)에 앉혔다.


무후의 독단에 반대해 전국에서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녀는 이를 모두 진압하고 제 아들 예종마저 폐위시킨 뒤, 나라 이름을 주(周)로 바꾸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 주나라를 고대의 주(周ㆍBC 1046~771)와 구분해 무주(武周)라 부른다. 당이 신라를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것은 고종 치세 때였지만, 이때도 이미 대외정책을 포함한 정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무후였다.


이렇듯 무후는 정치가의 첫 번째 자질인 강한 권력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적에게 무자비했고, 제 피붙이라도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후는 잉글랜드의 '블러디 메리'나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만큼은 피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다(카트린 드 메디시스 역시 메리1세처럼 신교도 학살,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조장했다).


과거제도와 행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민생에 눈길을 주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1세와 더 닮았다. 역사가들도 이를 인정해, 그의 치세를 태종이 다스리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가는 '무주(武周)의 치(治)'라 부른다. 이 '무주의 치'는 당의 전성기라 평가받는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690년에서 705년까지 15년간 존속했던 무주(武周)는 버젓한 왕조라기보다 당(唐) 역사에 잠깐 끼어든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와 병고가 육신을 괴롭히면서 무후의 권위는 점차 퇴락했고, 그녀는 신하들의 뜻을 따라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중종을 복위시켰다. 이와 함께 당 왕조도 부활했다.


오늘날, 측천무후의 후예라 일컬을 수 있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측천무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강한 성격뿐 아니라 그 시대의 왕조질서 덕분이기도 했을 텐데, (대의)민주주의가 널리 퍼져있는 오늘날을 그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유럽의 몇몇 여성군주들은 그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힘있는 여성 최고권력자는 인도나 방글라데시 같은 남아시아 국가에서 나왔다. 아니, 유럽 중심국가의 하나인 영국에서도 마거릿 대처라는 힘있는 여성 최고지도자가 나오긴 했다.


그러나 정치적 최고지도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 사회에서 여성이 행사하는 정치적 힘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대처 시절의 영국이 그랬다. 외려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오래 간직해온 북유럽 나라들에선, 최고권력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여성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하다.


남성의 육체적 힘이 여성보다 강하다 해서 남성이 정치활동을 독점하는 것은 인간 세상이 '동물의 왕국'이라는 뜻밖에 안 될 테다. 인류의 반이 여성이라면, 정치 영역의 절반이 여성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생물학의 원리를 거스르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의 진전이라는 것은 그 한 측면이 생물학과의 싸움이다. 남녀 사이의 정치적 평등은 성적 평등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힘에 비해, 아직 여성의 정치적 힘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나라다.


최고지도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여성의 정치적 힘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북유럽국가들이 보여주었듯, 정치의 여성화와 남녀의 정치적 평등에 시동을 걸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 미국은, 여성이 그 나라 최고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지난해에 보여주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민주당 경선 석패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서운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세계 최고의 권력 자리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선 예는, 측천무후의 경우를 제쳐놓는다면, 그 때까지 없었다. 그것은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의 경우, 격렬한 정치적 변동이 없다면, 차기 대통령으로 여성이 뽑힐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런데 그것이 좋은 일일까? 아니, 최소한 지금까지보다 덜 나쁜 일일까? 여성애호자인 나로서도,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고종석 칼럼